백요섭 작가의 ‘그림’들은 그렸다기보다는 박박 긁어낸 화면의 흔적이 두드러진다. 두텁게 여러 번 바른 화면에 단단한 것으로 긁어내 시각성 보다는 촉각성에 호소하며, 주변의 빛 및 관객의 시선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. 지우기를 반복하여 만들어낸 중층적 화면은 고대의 양피지(Palimpsest)를 참조한 것이다. 이전의 것이 다 지워지지 않고 남은 흔적이 그다음의 층과 결합되면서 생기는 불연속의 지점들아 다수 포진해 있다. 또한 그의 작품은 한순간에 작품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본 모더니즘과 달리, 거듭되는 지각을 통한 해석을 중시한다. 추상적 시각성이 순간에 승부를 건다면, 그의 작품은 시간적 추이에 따른 지각의 재편집, 즉 기억에 방점이 찍혀 있다. 기억에서는 시간이 재편집되는 현상이 일어난다. 층과 층의 간격에서 무엇인가 생성된다. 작가는 여기에서 스펙터클의 홍수 속에 회화가 있어야 하는 자리와 의미를 찾으려 한다.